카노사의 굴욕

아래의 그림은 '카노사의 굴욕'이라고 불리는 중세 세계사의 중요한 사건을 그린 아주 유명한 작품입니다. 11세기 신성 로마 제국 황제였던 하인리히 4세(그림 가운데)가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에게 용서를 빌기 위해 카노사 성에 찾아가 교황의 측근이었던 카노사성의 여자 성주 마틸다(그림 맨 오른쪽)에게 중재를 간청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황제는 왜 교황의 용서를 받기 위해 무릎까지 꿇어야만 했을까요? 

 

카노사의 굴욕

당시 황제에게는 성직자를 임명하는 '서임권'이 있었습니다. 황제의 서임권은 오래전부터 내려온 왕가의 권한 중 하나였는데, 황제는 자신이 선택한 성직자를 임명하면서 땅과 재산을 주며 충성을 맹세받았습니다. 이를 통해 종교계에도 영향력을 끼칠 뿐만 아니라, 각 지역 교회에 임명한 성직자를 통해 봉건영주들을 감시, 견제하는 역할도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임명된 성직자들은 점점 많은 부를 소유하게 되었고, 심지어 종교직 매매 등으로 종교가 부패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모습을 쇄신하고자 프랑스의 클뤼니 수도원을 중심으로 개혁 운동이 벌어지는데, 마침 당시 교황으로 선출된 그레고리우스 7세도 클뤼니 수도원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재임 초기부터 강력한 교회 개혁과 쇄신 운동을 펼치게 됩니다. 당시 그의 개혁안으로는 성직 매매의 금지, 성직자의 결혼 금지(결혼한 성직자는 이혼을 강요하기까지 하였음), 성직자 서임권은 교황만 행사(황제로부터 서임권 가져오기) 할 수 있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많은 군주들은 분노했는데 당시 27세 젊은 황제였던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의 그런 조치에 반발하여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를 폐위하려 했습니다. 그러자 교황은 1076년 로마 회의에서 하인리히 4세를 기독교 세계에서 파문시키고 그를 도와주는 귀족이나 성직자도 모두 파문시키겠다고 하였습니다. 당시 기독교 세계에서의 파문이라는 것은 황제 한 명을 비종교인으로 만드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황제가 속한 나라 자체를 교회가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었기에 파장은 굉장히 컸습니다. 

 

하인리히 4세는 계속해서 저항하려고 하였으나 이미 그가 다스리는 신성 로마 제국 귀족들이 교황 편에서 서서 황제에게 등을 돌리고 새로운 황제를 추대할 반란의 기미까지 보이자 그는 어쩔 수 없이 교황과의 화해를 선택하게 됩니다. 이를 위해 1077년 1월 말 북이탈리아의 카노사성에 거주하던 교황을 찾아가 황제의 복장이 아닌 허름한 옷차림과 맨발로 용서를 구하게 됩니다. 교황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해 황제는 3일 동안이나 눈밭에 맨발로 서 있는 등 굴욕적인 용서를 구하고서야 3일째에 교황의 용서를 받을 수 있었고, 3일 후 교황은 공식 회의를 통해 황제의 파문을 철회하게 됩니다. 

 

이 사건이 바로 세계사에서 황제와 교황이 충돌한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된 '카노사의 굴욕'입니다. 

 

 

 

본문 속 단어

 

▷ 굴욕 : 남에게 억눌리어 입신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서임권 : 주교, 대수도원장 등 고위성직자를 뽑고 임명할 수 있었던 권한입니다. 

 봉건영주 : 봉건제도는 중세 유럽에서 임금이 신하에게 영토를 주고, 영토를 받은 신하는 군사력 제공의 의무를 지는 계약으로 맺어진 통치 제도입니다. 봉건 영주는 이러한 봉건제도 아래 봉토를 받은 신하를 뜻합니다. 

 쇄신 : 뻐를 가루로 만들고 몸을 부순다는 뜻으로, 정성으로 노력함을 이르는 말입니다. 

 파문 : 신도로서의 자격을 빼앗고 종문에서 내쫓는 일, 특히 가톨릭교에서 공식적으로 행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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